근둥이의 블로그

노자

2. 삶의 의지를 실현하는 길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어울려 살면서 각자 자기 삶의 의지를 실현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기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육신이 있기 때문이니, 나에게 육신이 없다면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짐스러운 육신을 지닌 채 타자들과 얽혀 살아가면서 상처입지 않고 자기의 삶의 의지를 온전히 살아가려면 그에 대처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1) 부드러운 삶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노자는 우리에게 물 흐르듯 살 것을 권유했다. 이것은 부드러운 삶을 뜻한다. 

천하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이것을 이길 것이 없으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은 유약하나 견강한 것들을 이길 수 있다. 유약의 반댓말은 강강剛强이다.  흔히 사람들은 유약보다 강강을 좋아하지만 노자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강한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부드러운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그가 죽을 때는 단단하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도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여리지만 그것이 죽어갈 때는 말라 비틀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이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을 때 강력함을 뽐내면 멸망할 것이요, 나무도 강대하면 부러질 것이다. 무릇 단단하고 강한 것은 밑에 처지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윗자리에 있게 된다.

이러한 이론에 근거하며 도교에서는 도인술導引術을 발전 시켰다. 이는 기氣와 혈血을 잘 통하도록 인도하여 몸과 마음을 물과 같이 유연하게 하고 그로인해 불로장생하기를 추구한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탄력성있는 체제는 오래 갈 수 있으나 경직된 체제는 무너지기 쉽다하여 유약柔弱이 강강剛强을 이긴다고 말했다.

“천하의 지극한 부드러움이 천하의 지극한 견고함을 치빙馳騁한다.”

치빙은 “뚫고 드나든다.” 는 뜻으로 해석한다. ‘지극히 견고함’은 지극히 어려운 일을 가르키고 ‘지극히 부드러움’은 지극히 유연한 지志와 기氣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志와 기氣를 지극히 부럽게 만들 수 있다면 지극히 어려운 일에 부닥쳐서도 상처입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기를 “기를 집중하여 부드럽게 만들어 갓난아기처럼 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한나라 때 <노자>에 대한 주석을 낸 하상공은 여기서 말한 기를 정기精氣로 보았고 갓난아기는 안으로 사려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 세속적인 일로 때가 묻지 않은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정기를 오로지 지키며 어지럽히지 않으면 몸이 그에 따라 부드럽게 될 수 있고, 갓난아기처럼 안으로 사려가 없고 밖으로 때 묻는 일이 없게 되면 정신이 떠나지 않게 된다.” 고 했다. 도가와 도교에서는 갓난아기와 같은 몸과 마음을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 


정리하자면 갓난아기와 같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살아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았다. 이러한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면 천하에서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도 탄력성 있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겸허한 삶

노자는 강과 바다를 예로 들어 겸허하게 살아 갈 것을 주장하였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성인은 백성의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며 백성의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을 백성들보다 뒤에 돌본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들 위로 추대되어도 백성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아니하며 백성들 앞에 있어도 백성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즐거이 추대하며 싫어하지 않는다. 

민심이 한사람에게로 쏠리면 그가 왕이 될 수 있듯이, 온갖 시냇물이 흘러들어가는 강과 바다는 온갖 시냇물의 왕이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자는 사람들이 말 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낮출 것을 주장하였다. 


군주는 나라 안에서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자기 탓이라 여기고,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을 모두 자기에게 돌린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기를 “자기의 굴욕을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 이를 일러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일러 천하의 제왕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몸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대립전화의 법칙 

노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고, 자기를 낮추면 도리어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대립전화라는 세계관이 깔려 있다.

화여! 복이 의지 하여있는 바요, 복이여! 화가 잠재해 있는 바니, 누가 그 궁극을 알리오! 설마 정상적인 기준이 없을까? 정상은 다시 기이한 것으로 변할 수 있고, 선善은 다시 요사 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노자는 화와 복, 정상적인 것과 기이한 것, 선과 악 같은 대립상태는 서로 변하여 전화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화의 관계는 끝이 없기에 “누가 그 궁극을 알리오!”라고 했다. 


모든 것이 대립하는 이유는 모든 것에는 그의 대립자가 있다. 예를 들어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강함과 약함, 영예와 치욕 등은 대립하여 존재한다. 하여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기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지게 하며, 길고 짧음은 서로 나타나게 하고, 높고 낮음은 서로 존재하게 하며, 음音과 성聲은 서로 어우러지게 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게 한다.”고 했다. 노자는 사물들이 각각 그 대립자를 지니고 있고 그러한 대립적 존재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자기존재 성립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서로 반대 되는 것을 자기 존재 성립의 전제로 삼는 것을 상반상성相反相成이라고 한다. 노자는 상반상성이 사물들을 변화 발전하도록 하는 기본적인 추진력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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