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빌렘 플루서

 

빌렘 플루서 - 탈 역사 시대의 기술적 이미지

1. 들어가며

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더 이상 이미지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미지의 재생산과 복제에 대한 탐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실재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나아가 우리는 무엇이 가상이고 무엇이 실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이미지에 관한 이론들은 기본적으로 이미지가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논의를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음성언어, 문자언어, 이미지는 모두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그 중 음성언어와 문자언어가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본다면, 이미지는 비언어적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는 어느덧 인간의 감성을 규정하는 수준에 이르렀기에, 이를 단순히 가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게 되었다.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더 이상 현상이 아닌 본질이 되었다.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빌렘 플루서는 이미지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리는 것과 더불어 디지털 이미지, 디지털 가상을 바라보는 부정적 견해들에 반박하고자 한다. 그는 의사소통 전반의 문제를 ‘코무니콜로기(Kommunikologie)’라는 새로운 철학으로 제시한다. 코무니콜로기란 사회 전반의 모든 의사소통을 종합적·통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철학이라 볼 수 있다. 또 새로운 매체로 인해 변화된 새로운 사회를 ‘텔레마틱(Telematik)’사회라고 규정짓고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2. 매체로서의 문자와 이미지에 따른 구분

빌렘 플루서는 한 가지 학문을 바탕으로 지엽적으로 매체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지양한다. 대신 전체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 안에서 역사, 철학, 매체이론, 예술이론, 미학 등 다양한 학문의 통합을 바탕으로 한 ‘코무니콜로기’라는 총체적인 관점으로 매체와 사유방식, 그로인해 규정될 수 있는 사회체계 전반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는 3가지 관점에서 코무니콜로기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첫째는 존재론적인 관점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타인과 소통할 수밖에 없다. 결국 커뮤니케이션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둘째는 실존적인 측면이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불안해하고 고독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것들을 잊고 살만한 인생을 만들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기술사회적 측면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은 커뮤니케이션이 인간들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 기술, 도구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면, 2차 산업 혁명은 인간들 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커뮤니케이션을 규정하는 매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플루서는 매체를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세 가지 시대로 나눈다. 그는 문자를 중심으로 알파벳 이전 시대와 알파벳 시대, 알파벳 이후 시대로 시대를 구분한다. 또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미지 시대, 문자 시대, 기술적 이미지의 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알파벳 등장 이전에 이미지가 중심 코드로 작동했고, 이후 알파벳 시대 이후에도 다시 이미지가 중심 코드로 재 작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재작동한 이미지는 알파벳 없이는 불가능한 코드인 기술적 이미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대들은 사유형식도 각각 다르다. 알파벳 이전 사회는 신화와 주술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러한 사회는 사유방식 자체가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순환적 사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책이 중심이 되는 알파벳 시대는 선형적 사유방식이 지배적이라 볼 수 있다. 즉 기승전결을 중심으로 하는 논리적 사유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알파벳 이후의 사유방식은 개별적이면서도 모자이크처럼 구성된다는 특징이 있다. 결국 알파벳 이전 사회에서는 ‘의미’가 알파벳 사회에서는 ‘선형적 과정’이 그리고 알파벳 이후 사회에서는 ‘상황’이 문화가 기록되는 방식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시대구분 방식과 그 특징을 종합해볼 때, 알파벳 이전 시대는 ‘주술사회’, 알파벳 시대는 ‘산업사회’, 알파벳 이후 시대는 ‘지식사회’로 다시 규정해볼 수 있다. 알파벳 이전 시대의 이미지는 직접적으로 세계를 보여주지만, 알파벳 이후 시대의 이미지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플루서는 알파벳 이후 시대를 ‘기술적 이미지’의 시대라고 지칭하고 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에 대한 탐구는 그의 사진에 대한 철학으로부터 시작된다.

3. 사진과 사진기 그리고 사진 찍기

전통적 이미지가 문자가 등장하며 역할을 상실하듯, 문자 또한 기술적 이미지가 등장한 후 급격히 강력했던 지위를 잃는다. 기술적 이미지는 기술적 매체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다르다. 물론 둘은 세계 밖에 존재하는 인간이 세계를 표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기능적인 차이를 갖는다.


전통적 이미지는 세계를 즉각적으로 추상화한다. 당시에 문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가 생긴 이후에 등장한 기술적 이미지는 텍스트를 전제한다. 따라서 텍스트를 이미지로 추상화한다고 볼 수 있다. 즉 2단계 추상물이 텍스트이고, 기술적 이미지는 다시 텍스트를 거쳐 3단계 추상물이 된다. 결국 기술적 이미지에서 세계는 문자에 의해 개념화되어 2단계 추상화 과정으로 표현되고, 다시 그것이 기술적 장치에 의해 이미지로 추상화(3단계) 되는 것이다.


기술적 이미지는 사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은 인간들에게 대중화된 형태로서 기술적 이미지가 등장한 최초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플루서는 먼저 인간과 세계의 매개물로서의 사진, 즉 ‘매체로서의 사진’에 주목한다.


플루서의 사진기에 대한 관점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사진기가 노동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노동과는 무관한 놀이적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는 사진 찍는 행위에 대한 폄하를 막기 위해 놀이를 무시하는 입장에 대해 반박한다. 이전에 놀이는 일차적인 노동에 비해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왜 노동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노동이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더 즐거운 삶을 위해, 달리 표현하면, 잘 놀기 위해 노동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자 문화적 행위인 놀이는 존중받아야 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놀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위는 아니다. 사진기는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관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수많은 관점들 사이에서 사진사는 나름대로의 치열한 ‘현상학적인 회의’를 통해 하나의 관점을 택한다. 그렇게 해서 택해진 관점(사진)은 현상을 표현하게 된다. 이 때문에 사진 찍는 행위가 놀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위는 아니다. 또한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사진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진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만들어진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또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을 플루서는 ‘기술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기술 장치 시대에 요구되는 상상력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상상은 “세계의 사태를 장면으로 축소시키는 능력”이다. 사태를 본 사진사는 ‘현상학적 회의’를 통해 사태를 사진이라는 평면(장면)으로 축소시킨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기술적 장치(사진기)이다. 이렇듯 기술적 장치가 필요하며, 현상학적 회의를 거쳐야 하고, 상상력이 요구되는 사진의 탄생은 무시당할 이유가 없으며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이에) 플루서는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에서, 사진의 철학이 인간의 자유가 자동적인, 프로그래밍하고 프로그래밍되는 장치의 범위 내에서 어떤 여지가 없다는 것을 해명해야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어떤 여지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이 장치에 대해 지배당하면서도 죽음이라는 우연적 필연성에 직면해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에 대해 메타적으로 숙고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와 같은 종류의 철학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열려있는 유일무이한 형태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사진사와 사진기의 관계를 현대의 기계장치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관계와 대응시키며 탈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를 통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결국 ‘사진의 철학’이 현대 문화의 위기(예를 들면, 도구를 만든 인간이 다시 도구를 자신의 모델로 삼는 인간의 도구로부터의 소외과정과 같은)를 해결할 수 있는 문화비평의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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