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빌렘 플루서

 

4. 의미복합체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재평가

 

플루서는 선형성에 근거한 시대는 비판하고, 다양한 시각적 매체들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 기술적 이미지의 시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술적 이미지가 지배적인 시대는 알파벳 이후의 탈역사 시대이다. 이 시대는 컴퓨터 통신망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연결된 텔레마틱한 사회로, 체계성에서 카오스, 선형성에서 비선형성과 복합성으로의 전환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문자문화에서 이미지 중심 시대로의 전환은 지배적 감각기관과 사유기관이 귀에서 눈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플루서는 이런 이미지에 대한 평가절하에 반대하며 기술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전체적인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미지를 평면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미지는 본질 또는 실체와 무관하기 때문에 의미 없는 평면이 아니라, “의미를 나타내는 평면”으로 파악한다. 또한 그는 이런 이미지의 표면에 주목하며 이를 피상성이라 규정한다. 전통적 이미지 논의에서, 이미지는 본질이 아니라 현상이며,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곤 했다.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미지를 늘 사물의 본질, 또는 실체 그리고 존재방식과 관련해서 파악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본질과 실체를 어느 정도 반영하거나 무관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며 문제시 한다. 따라서 뵈메는 이미지를 본질과 실체와 분리된 고유한 것으로 현실과 관련해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사물의 본질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현실은 이미 실현된 상태로 현상으로 파악되며 경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이미지 자체가 현상이기 때문에 이차적인 것으로 폄하받지 않아도 되므로, 이미지의 지위 복원을 가능케 한다. 뵈메의 이러한 이미지 해석은 ‘매체 현상학’이라는 관점에서 이미지 현상과 이를 구현하는 매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플루서와 직접 연결된다.

 

플루서는 이미지를 “세계와 인간 사이의 매개물”로 정의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는 현상으로서의 세계이므로 본질과 실체의 세계가 아닌, 매개물에 의해서 매개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 속에서 이미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표상하도록 만드는 다의적인 상징복합체이며, 이러한 이미지들로 구성된 이미지 공간 또한 다의적인 상징복합체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의 의미는 표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단 한 번의 시선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시선의 작업을 ‘스캐닝’(Scanning)이라고 규정한다. 이 일차적인 스캐닝 작업을 통하여 이미지 공간은 하나의 “해석을 위한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일종의 의미복합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 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비롯한 이미지 공간은 무궁무진한 해석이 가능한 공간이며 이것이 바로 플루서가 정의한 이미지 세계다.

 

5. 디지털 가상 구하기

 

플루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미지와 이미지 공간에 대한 재평가를 기술적 이미지와 디지털 매체 시대의 디지털 가상에까지 적용한다. 그는 기술적 이미지, 즉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를 구별하지는 않는데 이는 둘 다 본질적으로 장치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디지털 이미지라는 표현보다는 '디지털 가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때 가상은 이미지 세계 또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는 디지털 매체시대에서 이러한 가상이 실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불신당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이러한 가상에 대한 불신은 디지털 매체 시대의 세계 또는 디지털 매체 시대에 형성된 이미지 공간을 주어진 세계가 아닌 하나의 만들어진 대안적 공간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표면이며 피상성의 세계이므로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에 관해 플루서는 이미지, 기술적 이미지 그리고 디지털 가상으로 이루어지는 표면과 피상성을 예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표면과 피상성이 깊이가 없다고 비판하는 행위와 이들을 자꾸 실체와 연관시켜 지금의 문화를 비판하려는 행위에 반박한다. 우리는 원본과 시뮬라크르 모두를 표면으로 지각하기 때문에, 보드리야르식으로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지각한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다원적인 세계이므로 현실과 허구, 실재와 가상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의를 기본으로 플루서는 컴퓨터 예술에까지 논의를 확장한다. 그는 컴퓨터 예술에 대해 이는 "희망이 가득한 섬"을 형성하는 것이며 "미래의 자유, 새로운 정치의식의 출발점"이라고까지 평가한다. 또한 그는 전통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예술가의 개념을 컴퓨터 예술에서 인정하지 않으면서, 컴퓨터 예술가들의 프로그램은 반드시 격리된 개별적인 예술가(과거의 위대한 예술가)에 의해 완성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한 종류의 프로그램은 일종의 합의를 형성하는데, 그렇게 탄생된 그림들은 더 이상 개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개별적인 의도들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예술 비평가들이 이러한 컴퓨터 예술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기술적 상상력의 부재를 꼽는다. 컴퓨터 예술가들은 컴퓨터라는 장치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책략적으로 돌리며 회전시켜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예술 비평가들은 과학적인 알고리즘(algorithm)들 속에 담긴 상상력의 힘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훈련되지 않아 과학적 방정식들을 시각적으로 보지 못하며, 과학적 자모음의 행동에 대해 청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술적 장치가 하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사태이자, 개체와 현상에 대한 관점을 열어 주는 것이며, 이는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있다면 컴퓨터 예술 또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즉 예술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허물면 지금의 컴퓨터 예술을 호모 루덴스에게 적합한 장치가 산출한 결과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6. 나가며

 

우리는 지금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기술적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플루서는 컴퓨터를 중심으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코드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코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이것이 만들어 내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무조건 비판하고 있다며 지적한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코드를 모르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문맹자가 될 수밖에 없다. 플루서에게 중요한 것은 장치에 대한 이해다. 즉 이미지 리터러시는 일종의 '장치 리터러시'라고 볼 수 있다. 장치에 대한 리터러시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텔레마틱한 사회의 거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는 디지털 망으로 구성되어 먼 것을 가깝게 느끼는 텔레마틱한 문화의 시대다. 이 시대에서 우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가져온다. 플루서는 이 문화에서의 인간 상호작용에 주목하며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말한다. 인간은 고독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데, 텔레마틱한 사회에선 쌍방향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를 중심으로 나를 타인으로부터 격리시키지 않고, 아무 이유 없이 포용해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현대 사회는 페이스북,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SNS의 등장으로 이전과는 다르게 쌍방향적인 열린 소통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생산자와 수용자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플루서가 이야기한 텔레마틱한 문화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피상성이라는 이유로 배척될 필요가 없다. 이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이미지 리터러시'또는 '장치 리터러시'가 없는 사람들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러한 장치 리터러시가 없을 경우, 이 소통구조를 유해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저 위에서 억압하려고 들 것이다. 그러나 파급력이 엄청난 이 소통 구조를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장치 리터러시가 없다면, 이러한 현상은 디지털 매체가 아니라, 다른 매체 시대가 앞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 넬슨 굿먼(Nelson Goodman)의 비실재론

 

가상현실의 현실성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으로서, 굿먼의 비실재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굿먼은 만약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어, 문자, 그림 등의 기호를 가진 옳은 버전(version)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굿먼에게 실재는 원래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며, 버전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버전의존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굿먼에 따르면 가상현실과 마찬가지로 현실이라는 것도 구성된 것이며, 간주된 것이며, 상대적인 것이다. 굿먼은 이미 주어진, 버전독립적인 세계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버전 독립적 세계가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그러하다는 것이다. 굿먼에게 세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간주된 세계이며, ‘우리에게’를 넘어서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그 논의 자체가 소모적이다. 우리는 버전독립적인 세계를 만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굿먼은 이러한 논의보다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버전들의 옳음을 규정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태도를 비실재론이라고 부른다. 비실재론은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여부를 괄호친다. 그에게 버전독립적인 세계는 몰라도 괜찮은 세계이다.

 

비실재론 안에서 가상현실은 다원적인 여러 실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새로운 개척지로서의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 현실의 종말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인간은 편리하고 화려한 가상현실에 익숙해질수록 불편하고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할 수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가상현실에만 머무를 때 인간은 현실에서의 삶, 역사, 업적, 인간관계 등을 잃게 된다. 또한 가상현실을 현실로서 간주하면서 인간은 가상현실과 현실을 혼동할 수도 있다. 예컨대 게임에서의 캐릭터를 현실에서도 적용하여 현실에서의 생활양식에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비실재론에 있어서 가상현실은 환상이나 비존재가 아니라 현실과 동등한 또 하나의 현실이다. 비실재론에 있어서 우리가 또 하나의 현실인 가상현실로 도피하고, 가상현실을 기존의 현실에 적용하는 일이 배제될 수 있는가? 하임(M. Heim)은 가상현실이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할 때 그러한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론적 안전장치가 굿먼에게는 없으며, 비실재론으로는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별하고 현실에 닻을 내리도록 하는 고정된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굿먼의 비실재론은 하임이 지적하듯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책상과 의자를 모두 실재로서 인정하면 책상과 의자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가상현실이 다양한 실재들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가상현실의 내용과 현실의 그것이 같은 것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가상현실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문제는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가상현실의 사건, 상황, 서사, 캐릭터 등을 현실의 것으로 혼동할 때 제한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 이채리, 「가상현실의 비실재론적 현실성」에서 발췌 및 일부 수정.

 

※ 참고문헌

 

심혜련, 『20세기의 매체철학』, 그린비, 2012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윤종석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1999

디터 메르시, 『매체이론』, 문화학연구회 옮김,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 참고논문

 

이채리, 「가상현실의 비실재론적 현실성」, 한국과학철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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