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노자

Ⅲ. 도를 추구하는 길

먼저 도를 추구하는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다.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외부 사물들에 대해 알고자하는 것이고 도를 추구하는 것은 사물이나 사건들의 근본을 밝히는 것이다. 노자는 이를 아는 사람과 박식한 사람으로 비유하여 구분한다. 아는 사람은 도를 아는 사람이고, 박식한 사람은 단지 지식이 많은 사람을 의미한다. 


노자는 인간의 현묘한 직관 능력에 먼지와 때가 끼지 않도록 하는 척제현람滌除玄覽한다면, 사물의 오묘한 이치, 즉 도를 비출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현람玄覽이란 현묘한 거울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현묘한 직관능력을 비유한 것으로, 이러한 능력에 어떤 것도 섞이지 않도록 깨끗이 한다면 도를 추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자기 본성에 섞인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비우고 자기 본성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수양공부를 ‘치허극 수정독 致虛極 守靜篤’이라고 한다. 노자는 “마음을 허虛의 극치에 이르게 하고 정靜을 독실히 지킨다”고 말하였다. 허虛는 외물이 본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정靜은 마음 그 자체가 본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곧 허정虛靜은 외물과 같은 것들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이러한 본성을 찾으려는 수양공부가 바로 ‘치허극 수정독 致虛極 守靜篤’인 것이다. 

Ⅳ.  만물은 도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공자는 의지를 가진 하늘로써 주재지천(主宰之天)을 말했다. 또 맹자는 인간에 내재하는 보편적 행위 원칙으로서의 도덕법칙으로서의 하늘인 의리지천義理之天을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고 말하며 하늘에서 도덕적 의미를 제거했다. 그는 중국 철학사상 처음으로 도道라는 개념으로 천지만물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였다. 


중국 상고 시대에는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존재를 제帝 혹은 상제上帝로 생각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과 인간사 모두가 상제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노자는 만물의 존재의 운동의 근거가 도道라고 주장하였다.
상제보다 먼저 도가 존재한다고 하는 노자의 주장은 이전에 지배적이던 상제 중심의 천도관을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의의를 가진다.

1. 도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묘함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히 변치 않는 도가 아니다.”고 하였다. 또한 “그것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라고 이름하고 그것을 들어보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라고 이름하며, 그것을 만져보려 해도 만져지지 않으니 미라고 이름 하려 한다.”


이처럼 도는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도는 인간의 사유기관에 의해서도 드러나지 않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도의 ‘無’라는 성질을 이끌어낼 수 있다. 도는 무형, 무명하여, 형체도 없고 어떠한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노자는, “그것의 자字를 지어 도道라고 부르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하여 대大라고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노자는 천지만물에 모두 통할 수 있는 것을 도道라고 하였다. 중국 위(魏)나라의 학자 왕필은 이를 두고 ‘포통만물(包通萬物)’이라 표현하였다. 즉 만물을 포함하면서 만물에 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곧 대大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에 대大 라는 개념은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도가 아무리 무형 무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한 공무이거나 영과 같은 것은 아니다. 노자는 이러한 성격을 지닌 도를 황홀이라고 표현하였다. 노자는 도의 황홀함에 대해 “도라는 것은 오로지 황홀하다. 황홀한데도 그 가운데 형상이 있으며, 황홀한데도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다. 아득하고 어두운데도 그 가운데 정기가 있다.”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황홀이라는 말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으나,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궁극적 실재를 표현한 말이다.

2. 도의 기능 – 그침 없는 생성

도는 신비스러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기능은 바로 천지만물을 끊임없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노자는 이를 곡신谷神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곡谷은 비어있다는 의미이고, 신神은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끊임없는 작용을 의미한다. 왕필은 비어있다는 것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버리고 자연에 따르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즉 도는 비어있는 채로 어떠한 의도나 목적도 가지지 않은 채 천지만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므로, 천지만물을 끊임없이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가 만물들을 낳고 덕이 이들을 기르고 물이 그것을 형성하며 세가 그것을 성장하도록 한다. 이 때문에 만물이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없다. 도의 높음과 덕의 귀함은 명령하지 않아도 항상 저절로 그러하다(自然). 그러므로 도가 만물을 낳고, 덕이 이들을 길러서 이들을 자라게 하고, 키워서 열매 맺게 하고, 익게 하며, 기르고 보호한다.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고, 베풀어 주었으되 그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어른이로되 지배하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묘한 덕(玄德)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도와 덕의 관계이다. 덕은 도가 개별적인 사물에 전개되어 그 개체의 본성을 이룬 것을 말한다. 도와 덕은 천지만물 모두의 본성과 개체의 본성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도와 덕 그리고 만물의 관계는 명령하지 않고(莫之命), 저절로 그러하도록 하는(自然) 막지명이상자연(莫之命而常自然)의 관계다. 또 도는 만물을 생기게 하고 베풀어주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도 않으며 주재하려 하지도 않는다. 도의 이러한 덕은 현묘하므로 노자는 이를 ‘현묘한 덕(玄德)’이라고 표현했다.

3. 도와 만물 – 하나에서 온갖 것으로

그렇다면 도와 만물은 어떠한 관계일까? 그것은 본과 말, 어미와 자식, 독자적 존재와 짝이 있는 존재, 하나와 무리, 영원과 변화, 통함과 막힘, 온전한과 치우침, 무와 유 등의 개념을 통해 비유될 수 있다. 도가 영원하다면 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왕필은 이러한 도와 물은 생지와 유지의 관계라 보기도 했다. 즉 도가 물을 생기게 한다면, 물은 도에 말미암는다. 즉 도는 만물을 ‘생지’하게 하고, 만물은 도에 말미암아 ‘유지’한다. 노자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품으면서 충기로서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만물은 도로부터 하나 둘씩 생겨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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