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니체

Ⅲ.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힘에의 의지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등의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세계 너머 저편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분법’은 뭔가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과 악, 영혼과 육체와 같이 말이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서양 문명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바탕으로 세계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와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 속에 있는 무수한 사물들인 ‘생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존재의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반면 생성의 세계는 변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폄하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니체는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듯 모든 것은 되어갈 뿐이며 영원한 사실이란 없다고 말했다. 니체에게 절대적 진리가 있다면 그리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 뿐이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변화하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발전해 변화와 행복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형이상학적인 세계, 즉 변화 너머에 있는 참된 존재의 세계를 구상해 냈고 그 세계야말로 인간의 고통에 답을 줄 수 있는 진리의 세계라고 믿게 되었다.


니체가 분석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발생원인은 이러하다. 생성, 즉 변화의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의 인식을 속이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생성의 세계에서 불확실과 불안만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행복을 바라기에 생성과 반대되는 세계를 상상해냈다. 그것을 ‘존재’라 칭한 인간은 자신을 그에 일치시키고자 노력해왔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인간의 무능력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형이상학적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한들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허상뿐인 세계와 내가 일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존재의 세계는 우리가 겪는 고통에 여러 가지 답을 줄 수 있다. ‘죄를 지어서 그렇다.’ 혹은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다.’ 와 같이 말이다. 언젠가 이데아의 세계를 경험하고 천국에 가면 고통이 없는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식이다. 그러나 저편의 또 다른 세계라는 것은 고통과 무능력, 그리고 더 없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자가 꾸며 낸 덧없는 행복의 망상이다. 니체는 존재라는 것도 결국 고통을 회피하고 견디기 위해 우리의 이성이 교묘히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야 말로 가상이라는 것을 폭로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의 허상을 폭로한 뒤 니체는 실재하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이는 생성의 세계에 존재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의욕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이며 그렇게 계속 변화해 감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존재는 변화하는 것이지, 자기동일성(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변화야말로 존재에 대한 근본적 확실성이다.


니체는 존재란 변화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그것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숨을 쉬며 움직이는 것이고, 또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 숨을 쉬는 것처럼 무언가를 바라고, 뭔가에 힘을 작용시키는 것이다. 니체는 이처럼 존재란 항상 힘에의 의지를 작동시킨다고 주장한다. 힘에의 의지가 복종하는 대상은 오로지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기 원하는,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본성뿐이다.

Ⅳ. 영원회귀.

니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곧 ‘생성’이다. 니체는 ‘생성’이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이라고 이해했다. 즉 모든 것은 변화하며 고정된 ‘존재’의 세계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세계의 본질이 생성이다’라는 주장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니체에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부분이다.


니체는 19세기 유럽 문명을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것은 생성의 세계인 이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저 세계에 ‘존재’의 세계를 건설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끔찍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부정하고 저 피안의 세계를 만들어 내 그것이 참되게 존재하는 세계라고 생각해왔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과 문명의 질병을 진단했다. 영원회귀 사상은 그러한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좋은 약 혹은 치료법이라고 보면 된다. 


이 사상의 가장 끔찍한 형식을 생각해보자. 현존재의 모습은 아무런 의미나 목표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재의 이 모습은 무로 종결되지 않고 불가피하게 다시 반복된다. 영원회귀, 이것이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이다. 모든 것이 허무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허무가 영원히 반복된다.


니체의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점, 그리고 그런 세계의 모습 탓에 인간이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점이다. 그럼 좀 더 자세하게 영원회귀에 대해서 살펴보자. 영원회귀가 이 세계에 대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흔히 하기 쉬운 오해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제 내가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를 계속해서 만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이렇게 황당한 주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오해는 순환론적인 세계관으로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4계절의 반복이라든지, 다툼과 화해의 반복과 같은 것들 말이다. 


대체 무엇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말일까? 영원회귀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핵심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니체의 영원회귀를 오해하고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니체가 ‘영원히 똑같이 되돌아온다.’라고 했을 때 그 행위의 주체를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재’라고 하면 ‘무엇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내 앞에 있는 책상, 우리 집 앞에 있는 예쁜 꽃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영원회귀라고 하면 저 책상이, 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계속 돌고 계속 되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존재는 ‘무엇이 있다’라고 할 때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을 의미한다. 서구 문명은 그 동안 세계를 존재와 생성의 틀로 나누어 바라봤다고 앞에서 말했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말하는 존재의 세계를 허구라고 비판했다.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고, 되어 가고 있는 상태, 즉 생성의 세계다. 만약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모든 것이 변화하고, 되어 가고 있는 생성의 상태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성의 상태, 즉 힘에의 의지들의 힘겨루기 상태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계는 수많은 힘에의 의지들이 쉴 틈 없이 서로 싸우며 영원히 경쟁하고 있고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여 또 다른 것으로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는 곧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에 극도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렇게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이 멸시받던 생성의 세계에 존재의 위치를 되돌려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생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받아 왔지만 니체는 오히려 반대로 생성, 힘에의 의지들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영원회귀를 생각할 때 고정된 무엇을 떠올리고 그것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과거에도 오늘에도 미래에도 똑같이 있는 채로 반복될 거라는 식이 아니다. 니체의 영원회귀란 내가 아는 누군가는 과거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한 번도 똑같았던 적이 없으며 계속 변화하고 있고 다른 누군가로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누군가의 계속된 변화 상태, 무엇으로 되어가는 상태만이 존재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니체의 생각대로라면 누군가가 그 자체로 힘에의 의지이고 생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힘에의 의지이고 생성이며, 고정된 어떤 실체가 아니다.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