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니체

A. 영원회귀와 니힐리즘

니힐리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ㅡㅡ지고의 여러 가치가 그 가치를 박탈한다는 것.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 ……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승인받고 있는 최고의 여러 가치가 문제일 때, 생존을 유지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확신이다. 그에 더하여, 피안이라든가, 신적이고 도덕의 체현인 성싶어 보이는 사물 그 자체라든가 하는 따위를 차용할 권리를, 우리는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통찰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니힐리즘은 ‘최고 가치의 상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고 가치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니체가 볼 때 서양의 문화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서양 문화의 기초인 그리스도교의 최고가치 ‘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좀 더 범위를 넓혀서 생각해보면 그 이외에도 인간들에게 덧 씌워진 다양한 규칙, 규범, 원리, 원칙, 이상적이고 초감각적인 것들 또한 최고의 가치에 속할 수 있다. 인간에게 목적을 가지게 하거나 질서,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렇게 ‘최고의 가치’라 불리는 것들이 그 힘을 잃어서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상태를 ‘니힐리즘’으로 이해한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니체의 니힐리즘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말이다. 그리스도교적 종교의 끝장을 선언함으로서 보편적인 믿음이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에게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는 위안과 위로가 되고 의지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지만 그 허구성을 폭로함으로서 그것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종교에서 자주 언급되는 금욕주의적 태도에는 ‘허무에의 의지’가 숨어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ㅡ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ㅡ의심의 여지 없이ㅡ 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 더 깊고, 좀 더 내면적인, 좀 더 독이 있는, 삶을 갉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죄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갔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ㅡ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ㅡ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것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 더욱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ㅡ이 모든 것은,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서양의 문화 속에서는 늘 ‘무엇을 위해’라는 물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왔다. 신을 위해, 현실세계를 초월하는 저편의 초월적 세계를 위해…… 이러한 의미들이 모두 금욕주의적 이상에 해당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것을 모두 허무에의 의지로 생각하고 이는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 전제들에 대한 반발임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더 이상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움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인간이 가져왔던 목표, 목적, 이상, 의미를 폐기하는 것이다. 결국 최고 가치의 상실이 곧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이다.


그들은 삶을 지탱해주었던 절대적 가치들이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라는 것을 통찰했다. 더 이상 절대적인 것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 상실은 전통 형이상학과 기독교의 본질이 사실은 니힐리즘이라는 사실의 귀결일 뿐이다. 그러한 최고의 가치들이 인간의 상상에 의한 허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문제는 삶과 세계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의미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감이다. 

B. 영원회귀에서 생기는 니힐리즘 극복

“가장 무거운 중량―만약 어느 날, 또는 어느 밤 악마(Dämon)가 지극히 적요한 고독에 잠겨 있는 너를 고독의 끝까지 미행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너에게 알렸다고 하면 어떨 것인가,―‘네가 현재 살고 있으며, 또 살아온 일생을, 너는 지금 한 번 아니 몇 번에 걸쳐서 수없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곳에는 새로운 무언가도 없고, 모든 고통과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인생에서 죄다 말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것들 모두가, 제 자신으로 회귀되도록 해야 한다. 게다가 이것저것 모조리 같은 순서와 맥락에 따라서 말이다……’ ―이것을 들었을 때, 너는 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이를 갈고, 너에게 이렇게 알린 악마를 저주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너는 돌연히 두려워할 만한 순간을 체험하고 악마를 향하여 ‘그대는 신이다. 나는 한 번도 이 이상으로 신적인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답할 것인가? 만일 이 사상이 너를 짓누른다면, 그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변화시키고, 필시 분쇄시킬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대는 이것을 지금 한 번 아니, 몇 번에 걸쳐서 반복하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하게 되어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최종적이요, 영원한 인증과 봉인 그 이상의 어느 것도 원하지 않기 위해서 너는 너 자신과 인생을 사랑해야만 할 것인가?”

이는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일 때 생길 수 있는 고통과 불안, 회의적 감정을 포함한 어려움을 토로한 것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적 가치들에 의존함이 없이 그저 나 자신으로 세상에 맞서는 것에서 느끼는 심리적 불안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어떠한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중압감이지만, 되레 이러한 상황을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만 있다면 그간 어떤 가치에만 의존했던 종속적 존재에서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 존재로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서는 ‘힘에의 의지’의 내재화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나 기독교와 같은 허상에 의존하여 힘에의 의지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요구된다. 니체는 그러한 가치로서 바로 영원회귀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힘에의 의지가 무한히 강화되며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계의 매 순간에서 도망가거나 절망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영원회귀 사상의 독특한 사실은 인간에게 어떤 결정을 요구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진 채로 결단의 무대에 올라온 인간은 극단적인 니힐리즘에 빠져 삶 전체를 부정해버리는 선택을 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고 긍정하기만 한다면 자신만의 가치 창조와 그 의미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한 결단의 순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묘사하는 부분도 있다.

“거기에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 그리고 진실로, 내가 본 것과 같은 것을 나는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한 젊은 양치기가 꿈틀거리고, 캑캑거리고, 경련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한 마리의 검고 무거운 뱀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일찍이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이토록 큰 구역질과 창백한 고초를 본 적이 있었던가? …… 그 때 나의 내면에서 외치는 것이 있었다. ‘물어라! 물어라! 뱀의 머리를 물어 떼어내라! 물어라!’ …… 그 양치기는 내 절규가 권한 대로 물어 버렸다. 그는 단숨에 잘 물어버렸다! 그는 뱀의 모가지를 멀리 내뱉어 버렸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ㅡ더 이상 목자도 아닌, 더 이상 인간도 아닌ㅡ변화된 자, 빛에 둘러싸인 자로서 그가 웃었다! 일찍이 지상에서 그가 웃는 것처럼 웃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뱀은 영원회귀 사유를 상징하는데 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인간이 자신의 결단으로 인해 환하게 웃고 위버멘쉬가 되는 순간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힘에의 의지를 인간의 본질로 하고자하는 인간을 위버멘쉬로 만드는 결정적인 사유가 바로 영원회귀 사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을 허무적인 상황에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여기서 우리가 ‘영원’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따라 니힐리즘은 소극적 형태와 적극적 형태로 구분해볼 수 있다.


동일한 것이 무한히 반복되기만 한다면 분명히 모든 인간의 행위는 헛수고이며, 위버멘쉬에로의 길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삶은 똑같이 되풀이되며 그 안에서의 일체의 시도는 공허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극적 니힐리즘에 빠져 그 속에서 몰락하는 것이다. 니체가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은 이와 같은 소극적인 니힐리즘이다. 


회귀라는 것은 그저 단순한 되풀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이해하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얽혀서 순간에 응집된 바로 그것이 영원이자, 시간의 전부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자한다. 이러한 의미로서 영원성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간 우리는 각종 허상에 매몰되어 인간 본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니힐리즘 그 자체를 받아들여 그 극복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영원회귀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의 결단이 동반되었을 때 가능하다. 니체는 이 순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운명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운명애는 단순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의미 정도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조차 자신의 삶이기 때문에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운명에 묶어놓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보다 자발적이고 창조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렇게 결정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다. 

창조적으로 의욕하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 설정된 모든 것을 의욕된 것으로, 항상 동일하게 의욕할 만한 것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곧 위버멘쉬의 삶의 방식이며, 니체가 부정적인 운명적 성향과 감내하기만 하는 수동성에 대적하여 설정하는, 운명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이제까지 부정되었던 삶의 면들조차도 필연적이고 의미심장하며, 영원히 회귀하기를 원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인정하고 긍정한다. 이러한 운명애를 지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무한히 체험할 것을 갈망하는 자이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미래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자이다. 현재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인간존재는 자기 극복의 실험 장소이며, 창조를 통한 자기 변화를 한다. 창조적 힘은 고통으로부터 나오고, 창조는 고통 받는 자의 정식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항상 고통 받는 인간이며 고통에 대한 긍정은 삶의 기본 특성이다. 삶에 대한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창조력의 긍정성을 보증한다. 삶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며, 신성한 자기애는 운명애의 필연적인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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