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니체

 

Ⅰ. 서론

니체가 죽은 지 100년이 넘은 현 시점에서도 그의 사상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다. 그 해석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많은 의견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그 중 유독 ‘영원회귀’사상에 대한 해석은 다소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기반이자 그의 다양한 주장을 아우르는 기본 틀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영원회귀 사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고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해석들을 할 수 있으며 그러한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의 시작점은 플라톤적 이원론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다. 당시 유럽 문명은 이러한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차안과 피안, 현실세계와 초월적 세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니체에게 있어서 게으른 철학일 뿐이다. 현실에서의 삶은 경시한 채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상정하여 그것만을 동경하고 그것을 위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버텨내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인간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사람 그 자체를 소외시킬 뿐이다.


이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한다. 근대 문명은 이성이나 신에 대한 믿음을 맹목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인간 개개인은 그런 가치에 의존하여 그 본연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했다. 니체는 기독교적인 것의 최고 가치인 신을 부정해버렸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팽배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선언이었고 지금 느끼기에도 다소 위험하게 들릴 정도다. 니체는 이를 통해 형이상학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곧 이원론과 목적론의 죽음이다. 이를 통해 니체는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지 위의 세계만을 유일한 현실, 유일한 실재로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그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라고 여겨온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허탈함이다. 더 이상 어떤 가치나 이상을 위해 살아오던 삶이 그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돈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운다. 존재의 해(年는)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서지고, 모든 것은 새로이 짜 맞춰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고리는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모든 순간마다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의 공은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그 자체로 파고드는 것보다 니체의 다른 사상들과의 관계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Ⅱ장에서는 니체의 말로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것이며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상인 ‘위버멘쉬’개념도 간단하게나마 짚어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니체가 비판한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유럽 문명이 어떻게 받아들여 이용해왔는지 또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의 본성인 ‘힘에의 의지’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Ⅳ장에서는 영원회귀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영원회귀는 간단히 말하자면, 우주의 모든 것은 시간의 영원한 흐름 속에서 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지금까지 끝없이 반복해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존재하는 것에게는 영원한 순환, 영원한 회귀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똑같은 것이 계속 반복될 뿐이라면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결국 아무런 가치도 찾기 힘든 니힐리즘으로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영원회귀의 이러한 면을 어떻게 극복하고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해볼 것이다. 또 니체가 말하는 ‘순간’은 무엇이고, ‘영원’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기본적으로 니힐리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영원성’에 대한 이해가 동반된다면 소극적 니힐리즘이 아닌 적극적 니힐리즘으로 이행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이 사상을 바탕으로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 등에 대해 논할 것이다.

Ⅱ. 신의 죽음과 위버멘쉬의 탄생

니체의 말 중 유명하고도 다소 충격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니체는 단지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신의 죽음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유럽 문명의 병듦과 그 결과로서의 신의 죽음을 선언하려고 했다. 니체가 보기에 유럽 문명은 항상 삶의 현장인 ‘대지’의 가치를 부정해왔고 초월적 세계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두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나 근대 철학자인 칸트의 ‘물자체’ 개념이 이러한 세계관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는 과학의 발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이미 신에 대한 신앙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바라볼 때 허점투성이였던 기독교는 처량할 정도로 그 위치와 권위가 떨어져 있었다. 무신론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니체가 신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서양 문명의 병폐는 그가 살았던 시대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과학적 진리나 이성에 대한 맹신 역시 신앙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겉모양만 바뀌었을 뿐 과학자와 철학자가 교회 사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완전한 것을 꿈꾸었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부정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겠다며 ‘신은 죽었다’는 다소 충격적인 말을 전파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왜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고 했을까? 신의 죽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줄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신은 죽었고 저 세계에 대한 신앙도 없다. 우리 스스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니체는 신을 완벽하게 죽이는 방법이 ‘웃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제 대지 위에서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즉 대지라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웃음 지으며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있어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다. 니체가 우리에게 전한 기쁜 소식은 바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야 할 시간이 왔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신의 죽음은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낡은 도덕과 형이상학, 신앙, 가치 등과 같이 삶을 부정해왔던 모든 것에 대한 사망 선고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부정해왔고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세계를 꿈꾸게 해 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가 그러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온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삶의 조건이라 생각해 온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다면 우린 허공 위에 떠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어디서 왔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 찾아낸 답이 바로 신이나 도덕과 같은 가치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없앤다면 커다란 혼란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니체야말로 이 점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상실하는 측면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다고 가정해보자. 중학교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고등학교에 가면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졸업은 한편으론 친했던 이들과의 이별을 가져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만남을 가져온다. 


니체가 생각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인간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던 신이 죽었다면 삶의 이유가 사라진 셈이지만 그것은 신의 죽음이란 사건의 단면만 본 것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에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희망한다. 그 존재가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다. 위버멘쉬는 독일어인데 영어로 하면 'superman'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독일어로 ‘Über’는 영어의 ‘over’와 같은 말로 ‘~을 넘어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곧 인간을 넘어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인간은 곧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라는 의미와 같다. 


니체가 말하는 ‘인간적인 것’이란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지 않은 인간을 말한다. 니체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평온하게 안일하게 유지하고 싶어 한다. 곧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니체에게 이 세계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곧 ‘대지’다. 힘에의 의지는 대지의 본성이다. 니체가 말하는 대지란 인간이 만들어낸 ‘천상의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와 같은 가상의 세계에 대립하여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의미한다.

들어라,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에 대해 가르치노라!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한다.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해야 한다’고! 그대들에게 명하노니, 언제까지나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대지를 초월한 뭇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을 타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생을 경멸하는 자들이며, 대지 쪽에서 질색을 하고 죽어가는 자들이며, 독을 자청하는 자들이다. 대지는 이러한 자들에게 지쳐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위버멘쉬는 곧 대지에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대지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대지의 본성인 힘에의 의지에 충실하기 위해 인간은 ‘인간적인 것’을 극복해야 한다. 힘에의 의지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를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신체는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대지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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