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그림 읽어주는 여자

 

<그림 읽어주는 여자>를 읽고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미’라는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미’의 사전적 정의는 ‘감각, 특히 시청(視聽)을 매개로 얻어지는 기쁨·쾌락의 근원적 체험을 주는 아름다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한자 아름다울 미(美)로부터 쉽게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미’의 사전적 정의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눈으로 봤을 때(혹은 다른 감각기관으로 느낄 때), 쾌락이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러한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가? 나는 이러한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기쁨, 슬픔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포함시켜, 인간이 예술을 접했을 때 느끼는 ‘감흥도’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에 따른 예술의 의미와 기능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려 한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에서 글쓴이는 다양한 그림들을 제시한다. 그 그림들은 제각각 사연이 있다. 글쓴이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 그림을 제시하기도 하고, 작가가 생각하기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이 그림을 이런 식으로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그림을 제시하기도 한다. 나는 글쓴이의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 작품을 보며 글쓴이의 입장에 공감해보기도 하고, 글쓴이가 원하는 종류의 독자가 되어 그러한 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그림을 감상해보기도 했다. 또 어떤 입장에도 공감할 수 없을 땐, 어느 누구의 개입도 없이 그 그림과 단둘이 마주하기도 했다.

그림과 내가 단둘이 마주할 때, 주로 나는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그저 모르는 채로 다른 그림으로 넘어갔다. 그림의 제목을 보더라도 도저히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없고, 그 그림을 아무리 쳐다봐도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작품이 많았다. 그런데 유독 내가 몰입해서 본 그림이 있었다. 빨간 배경의 집안에, 흰 옷을 입은 한 여자는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집 밖에는 다양한 건물이 있고 언덕도 있고, 나무도 있고, 구름도 있고, 하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흐리다. 선명한 것은 빨간 배경의 집 안에, 흰 옷을 입은 ‘나’ 뿐이다. 다리 한 쪽을 구부리고 서있는 엉거주춤한 여자는 어딘가 불안하다. 그림의 제목은 <그리움>이다. 그렇다. 그녀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불안한 자세는 그녀 내면에 결여감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마 그녀는 누군가와 이별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를 잃었다. 그가 죽지 않았을 지라도, 그녀는 그를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를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움>이라는 그림에 이렇게 깊게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림속의 그녀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림을 본 순간 그녀의 자세와 그녀 주변의 배경을 통해 그림 속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예술을 보는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개인이 자란 환경, 서로 다른 환경에 따른 저마다의 경험과 같이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개인의 미적 기준은 달라진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내가 기쁨과 쾌감을 느낀 작품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술을 볼 때, 어떤 작품을 보면 대체적으로 기쁨을 느끼고, 또 어떤 작품을 보면 대체적으로 슬퍼하는 일종의 보편적 경향성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기준일 뿐, 한 명이 예외도 없는 절대적인 기준일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을 보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나는 개인이 어떤 예술을 접했을 때 느끼는 감흥은 그 개인과 예술 작품 간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예술과의 공통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그림을 보고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작품의 주인공과 비슷한 슬픈 감정을 느꼈거나 혹은 그 그림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공감한 나머지, 그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 내가 어떤 영화를 보고 슬퍼한다면,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경험한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없더라도 그 상황에 감정이입함으로서 그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영화를 보는 순간 그대로 느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통해 내가 생각해본 예술의 기능은 ‘위안’이다. 인간은 어떤 예술 작품을 보고 감흥을 느끼면 그 순간 예술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이는 예술과 자신의 공통점을 느끼고 그 예술작품에 공감하는 과정이다. 작품에 제대로 몰입하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작품과 나 이외에는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어떤 것의 개입이나 방해 없이 작품과 나는 단둘이 마주한다. 이러한 몰입은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작품과의 교감을 통해 느끼는 개인의 쾌감이다. 이러한 쾌감은 답답한 현실로부터 멀어져 또 다른 세계로부터 받는 ‘위안’이다. 인간은 또 다른 세계에서 얻는 위안으로부터 다시 현실세계 속에서 활동할 힘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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