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싯다르타를 반 정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허무주의 혹은 회의주의적 입장이었다. ‘열반, 불성 등으로 불리는 것은 결국에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 경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 그러한 경지인지 누가 알며,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 경지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그러나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열반이나 불성이라는 경지를 상정한 내가 다시 한 번 함정에 빠졌음을 느꼈다. 나 역시 제2의 싯다르타로서 최고의 경지를 상정해 놓고 그것을 쫓은 것이다. 이는 언어나 문자에 얽매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며, 고타마의 설법을 듣고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것들은 ‘허(虛)’한 현혹의 대상들인데 그것에 속아 ‘실(實)’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바는 싯다르타가 뱃사공을 처음 만난 초반부에 이미 제시된다.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게 해준 바수데바에게 보답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수데바는 ‘언젠가 갚을 때가 있을 것’이라며 강으로부터 ‘만물은 유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수데바는 싯다르타가 숱한 번뇌를 모두 경험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고타마가 아니라 뱃사공인 바수데바가 진정한 부처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또한 덫이다. 고타마든 바수데바든 싯다르타든 결국 같다. 그들은 이미 모두 부처이고 하나이다. 속세와 속세가 아닌 것을 나누고, 부처와 부처가 아닌 것을 나누는 등의 사고방식은 그들을 얽매이도록, 머무르도록, 집착하도록 만들 뿐이다.

책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파악했지만 여전히 가려운 구석이 있었다. 바로 ‘사랑’이다. 싯다르타는 자식에 대한 사랑 또한 결국 집착임을 깨닫고 아들이 속세에 뛰어드는 것을 끝내 놓아준다. 그런데 과연 사랑을 집착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가?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으로 변할 수 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두고 ‘집착’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가? 적당히 사랑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이내 내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집착했기 때문에 또 다시 오류를 범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적당히 사랑하든 많이 사랑하든, 사랑이든 집착이든, 선이든 악이든 모든 것이 유전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이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말이나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유전한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개념을 깨닫는다면 내가 아닌 무엇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진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지고, 특별히 무언가를 목표로 삼아 그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 자신의 내면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는 설법이 만연하고, 돈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군림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싯다르타’는 ‘나 이외의 것’ 보다는 ‘나 자신’에게 더욱 집중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결국 남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사회에서 요구되는 무언가를 추구하기 보다는 내면에 목소리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는 각박한 현실 속의 나에겐 분명히 와 닿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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