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둥이의 블로그

조용하지만 반항적인 임창용

그의 도전적인 삶을 함께 걸어보다.

 

야구선수 임창용에 대한 추억

 

야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를 다녀와서 소파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TV를 켰는데 공을 옆으로 던지는 어떤 야구선수의 투구폼이 너무나 역동적이었다. 폼만 멋진 줄 알았더니, 구위 또한 대단한지 캐스터와 해설자가 엄청나다를 연발하며 그 선수를 연신 칭찬했다. ‘아니, 폼도 멋진데 공의 위력까지 엄청나다니...!’ 필자는 그 이후로 임창용을 좋아하게 되었고, 당시 임창용의 소속팀 삼성라이온즈의 팬이 되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임창용이지만, 야구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이름일 수도 있다. 그는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의 이치로에게 연장 10회 결승타를 맞아 패전투수가 되며 유명세를 치른 적이 있다. 워낙 반항적인 이미지에다 정면승부를 즐겨하는 임창용이었기에, 당시 감독의 고의사구 지시를 어기고 정면승부를 했다는 오해로 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였던 양상문 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과 당시 대표팀 포수를 맡았던 롯데 자이언츠 포수 강민호 선수를 인터뷰한 결과, 임창용에게 사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임창용은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침묵했다. 무엇이 어찌됐든, 자신이 패전투수였기에 자신이 다 짊어지고 가고 싶었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야구선수로서의 첫 걸음 그리고 시련

 

그는 한 특집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자신이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정말 엉뚱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도시락에 침을 뱉고 도망가자, 그 친구에게 손에 쥐고 있던 포크숟가락을 던져 뒤통수에 꽂히게 했다는 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그에게 부모님을 데리고 오던지, 야구부에 들던지 둘 중 하나를 고르도록 했고, 부모님을 데리고 오기 싫은 그는 어쩔 수 없이 야구부에 들었다고 한다.

 

1995년 해태 타이거즈(KIA타이거즈의 전신)에서 데뷔한 그는 첫 해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다. 2군을 드나들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 싫을 때는 선수단을 이탈하기도 했다. 당시 해태의 2군 감독이었던 김성근 현 고양 원더스 감독은 당시 성실하지 않았던 임창용에게 너 같은 놈 필요 없다며 그를 내쫒았다고 한다.

 

그렇게 쫓겨나고 보니 임창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야구 외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성근 감독님의 집에 찾아가 3시간 동안 문을 두드리며 기다렸고, 김성근 감독님은 나 믿고 야구 한번 해보자며 그를 용서했다고 한다. 이후 임창용은 한국 최고의 사이드암 투수로 자리매김 한다. 1998년과 2004년 각각 34세이브와 36세이브로 구원왕에 오르고, 1999년에는 구원투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정규이닝을 채우면서 방어율(2.14)왕에 오른다.

 

2001년부터 3년간은 선발투수로서 14, 17, 13승을 올리며 보직에 구애받지 않는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국제대회에서도 국가대표팀 선수로서 우리나라를 빛내기도 한다. 하지만 선발, 중간, 마무리를 넘나들며 던지자 너무 자주 등판한다고 하여 애니콜이라는 별명 또한 얻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잦은 등판으로 그의 팔은 닳고 닳아 2005년에는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는 혹사당했다는 평가와 함께 한물 간 선수취급을 당하게 된다.

 

뱀직구임창용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누가 뭐래도 뱀직구. 다른 선수들처럼 직선으로 포수의 미트에 꽂히는 직구와는 다르게, 그의 직구는 뱀처럼 꼬불꼬불 휘어 들어간다. 직구인데도 워낙 변화가 심하니, 타자들 입장에선 직구인지 변화구인 혼동이 되기도 한다. 보통 옆으로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는 위로 던지는 오버핸드 투수보다 구속이 훨씬 적게 나온다. 그러나 사이드암 투수로서는 정말 드물게 그는 150km를 훌쩍 넘어가는 공을 던진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대회에서 사이드암인데도 엄청난 구속이 나오는 그를 본 이탈리아대표팀 감독이 그에게 매료된 나머지, 이탈리아 브랜드의 차와 명품 등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이탈리아 야구리그로 오라는 제안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 그는 투구 폼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특이한 투수다. 원래 그는 정통파 오버핸드 투수가 아닌, 사이드암 투수였다.

 

그런데 2007년부터 손을 조금 올려서 위로 던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오버핸드로 던지기도 하고, 사이드암으로 던지기도 하며, 그 중간인 쓰리쿼터 형태로도 던지는 등 자유자재로 폼을 바꿔 던지는 투수가 되었다. 이런 투수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투수이다.

 

 

 

(사진출처 = 조선일보 스포츠)

 

모두의 예상을 깨는 반항적인 선택

 

3년간 부진의 늪을 헤매던 임창용. 2007년 말 삼성라이온즈와의 계약을 앞두고 엄청난 연봉 삭감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일본행을 택했다. 정말 반항적이지 않은가? 일본프로야구는 한국프로야구보다 한 수 높게 평가되는 곳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낮은 연봉을 받고(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최저연봉), 더 힘든 곳을 선택한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조차도 전성기가 지나 신통치 못한 선수가, 한 수 위라고 평가받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일본진출 첫해 1533세이브 방어율 3.00의 성적으로 보란 듯이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마무리투수자리를 꿰찼다. 수술 후, 돌발적인 일본으로의 도전을 두고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의욕이 안 생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는 일본에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128세이브 2.15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최고구속 160KM까지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낸다. 2012년엔 일본프로야구의 투수와 타자를 모두 포함한 전체 선수 중 6번째로 많은 연봉을 받았다. 연봉 순위가 말해주듯 그는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최고의 투수였다. 그러나 2012, 그는 너무나 절망스럽게도 똑같은 부위에 부상을 당하면서, 똑같은 수술을 받게 되었다.

 

똑같은 부위의 두 번째 수술. 수술 받을 당시 임창용의 한국 나이 37. 운동선수로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모두가 은퇴 혹은 안정적인 한국무대로의 복귀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미국행이었다. 부상당한 늙은 선수와 어떤 구단이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겠는가? 역시 그는 계약조건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채, 안정적인 삶보다는 다시 한 번 도전을 택했다. 그는 선수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위기를, 더 큰 무대로의 도전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임창용은 미국의 시카고 컵스 구단으로의 이적을 선택하면서, 한국선수로서 한국, 일본, 미국 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네 번째 선수가 되었다. 꾸준한 재활과 마이너리그를 거쳐 201397.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의 나이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다. 7회초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등판한 그는 긴장한 탓인지 첫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일본프로야구 시절,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아오키에게 안타를 내줘 11,2루 위기를 자초한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타자에게 던진 초구가 병살타로 이어지며 첫 등판을 2/3이닝 무실점으로 마무리한다.

 

이닝을 마친 그는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이것은 해태 시절 후배였던 김상진 선수를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메이저리그에 오기 전 임창용은 두 달간 마이너리그에서 생활하며 해태 2군 시절을 떠올린다. 자연스레 그 당시 함께 동고동락했던 김상진을 추억한다. 그는 99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무살에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고 전해진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최고는 이제부터!

 

항상 느끼지만 그는 반항적이다. 주자 만루의 위기에 내몰려도, 칠 테면 쳐보라는 식의 한가운데 직구로 정면승부를 즐기고, 또 팔꿈치 인대가 끊어져 선수 생명에 위기가 와도, 기죽지 않고 더 힘든 곳으로 자신의 무대를 바꾸는 그는 너무나도 반항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 반항심이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까지 밟아본 원동력이 아닐까?

 

2014년 삼성라이온즈로 돌아온 그는 2016년 고향인 광주 기아타이거즈로 오지만, 현재 방출당한 상태다. 76년생인 그의 나이 올해 44. 아직 1이닝 정도는 충분히 책임져 줄 수 있는 투수 자원으로 평가받지만, 나이, 그리고 할 말은 하는 성격 때문인지 원하는 팀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온전히 필자의 생각이지만, 3월 시범경기 시즌 전에는 계약하는 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제가 살아보니까 인생에서 속도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언제가 됐든 이루고 싶은 건 이룰 수 있더라고요. 그러려면 인생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아요. 방향만 올바르고, 그 길로만 꾸준히 나간다면 느려도 언젠간 원하는 장소까지 올 수 있는 것 같아요. 보세요. 저 지금 미국에 있잖아요(웃음).”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PD가 묻는다.

최고의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임창용이 대답한다,

최고는 이제부터. 최고는 이제부터 만들어 나갈 생각입니다.”

 

 

 

(사진출처 = MBC스포츠플러스 임창용의 패스트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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